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 (문단 편집) === 업적 및 긍정적 평가 === >키케로는 야심이 높고 자기 자랑도 심했지만 남을 시기하는 일은 전혀 없었다. 그가 쓴 글에서도 찾아볼 수 있듯이 그는 자기를 칭찬하는 사람에게나 비난하는 사람에게 언제나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중략) >키케로는 시칠리아에 재무관으로 가기도 했고, 카파도키아와 킬리키아의 총독으로 가 있었다. 그리고 그 시대는 악덕이 판을 치고 있었던 때였다. 그래서 로마의 장군이나 총독들은 공금을 몰래 챙기는 것은 오히려 비겁하다는 듯이 아예 드러내놓고 약탈하곤 했다. 그 지방 주민들의 재산을 약탈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으며, 그것이 너무 지나치지만 않으면 훌륭한 총독으로 이름을 떨치던 때였다. 그러나 그런 시대에 살면서도 키케로는 돈에 대해 무관심했으며, 어질고 너그러운 태도로 한층 더 큰 명성을 얻었다. 그는 집정관을 지낼 때도 카틸리나의 내란을 잘 다스려 칭찬을 받았으며, 1인 집정관이나 다름없는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여건이 주어졌다. 그러나 그때에도 키케로는, "통치자가 공정한 정치를 해야만 나라에 재난이 없다"는 플라톤의 말을 뚜렷이 증명해 보였다. >----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플루타르코스 >우리는 기나긴 고대 로마 역사에 있어 남녀를 막론하고 다른 누구보다 키케로의 생애와 성격을 더 많이 알고 있다. 그는 공화정 말기에 관해 가장 귀중한 개인의 사료를 제공할 뿐 아니라, 당시의 극적인 사건들에 적극 참여한 바 있다. 무엇보다 키케로는 자신의 저술들을 통해 동시대인인 [[폼페이우스|폼페이우스 마그누스]]나 [[율리우스 카이사르]]보다는 훨씬 더 인간적인 모습으로 다가온다. 그는 결점들을 지닌, 일관성 없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이상주의자이고 원칙주의자이며 용감한 인물이었다. 그는 무너져가는 공화정을 부질없이 수호하느라 자신의 인생을 바쳤다. >(중략) >편지에서는 또 연설가이자 철학자인 키케로의 결점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그는 약하고 우유부단하고 허영심 많고 변명이 많으며, 종종 자기 자신과 남들에 대해 그릇된 판단을 내렸다. 동시에 총명하고 사려 깊은 이상주의자의 모습과 함께 때때로 영웅적인 모습도 엿볼 수 있다. 그는 자신의 이상에 따라 살려고 노력했다. 종종 그렇게 하는 데 실패했다는 사실을 자신도 알고 있었지만 말이다. 키케로는 궁극적으로 자기 이상을 수호하는 데 일생을 바쳤다. 카이사르보다 1년 반을 더 살았지만,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옥타비아누스]](후일의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이끄는 제2차 삼두정의 명령에 의해 살해되었다. 그러나 키케로에게 알맞은 묘비명을 마련해준 사람은 바로 아우구스투스였다. 키케로의 작품을 읽고 있는 손자를 보자, 그는 책을 집어들고 한참 읽은 다음 돌려주며 말했다. "얘야, 그는 학식이 높은 분이란다. 학식이 높을 뿐 아니라 조국을 사랑했지." >---- >「로마 공화정」, 데이비드 M. 귄 >세계사의 어느 시대도 하나의 인격 속에 정치가이자 철학자로서 그(키케로)보다 더 위대한 자질을 갖춘 인물을 배출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의 권위는 엄청난 무게를 갖는다. 권력의 세 가지 요소를 지지하는 그의 결연한 주장은 변할 수 없는 근거 위에 서 있다. 법은 정의를 구현하고, 측정하고, 또 보호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다. 시간이 흘러도, 법은 다른 정치체제 속에서는 확실하게 보호될 수 없다. 공화정이라는 이름 자체가 다음과 같은 것을 의미한다. 즉 인민의 재산이 입법을 통해 주장되고, 정의가 지배하도록 결정을 내리는 것이다. >---- >[[존 애덤스]][* [[미국]] 제2대 대통령] 키케로는 사후 많은 정치인들과 철학자들에게 대체로 긍정적인 평가를 받은 인물이다. 동시대인보다 후대인에게 더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심지어 제정 로마시대 때도 그러했다. 그는 공화주의자로서 공화정을 지키려고 애썼지만 결국 그 뜻을 실현하지 못했다. 하지만 정치적으로는 실패했으나 문학, 철학면에서는 많은 업적을 남겨 로마를 대표하는 철학자, 문학가로 아직도 그 이름을 떨치고 있다. 내용 자체는 그리스에 비해 아주 얕고 천박하다는 혹평도 있으나, 키케로는 로마인으로서는 '그리스나 동방(이집트 포함)에서 수입한 학문'이 아닌 로마인으로서 로마의 철학과 문학을 하려고 시도한 최초의 인물로서 높게 평가되고 있다. 또한 플라톤의 계보를 잇는 이상주의적 스토아 철학과 그 반대로 매우 현실적인 정치학 및 수사학을 결합하는 어려운 일을 해냈으며, 그 결과 공익을 추구하는 공화정 로마만의 철학을 보여주었다. 그에 그치지 않고 실제로 자신의 철학에 맞게 활발한 정치적 활동을 벌였는데, 위인 중에도 키케로처럼 덕업일치와 출세와 재산까지 전부 이루어낸 경우는 정말 드물다.[* 다만 안타깝게도 화목한 부부생활까지는 가지지 못했다. 키케로는 결국 첫 번째 아내인 테렌티아와 이혼을 하였는데, 플루타르코스는 이렇게 설명한다. "그녀는 전쟁 중에도 그를 보살펴 주지 않았고, 피난을 갈 때는 필요한 물건들도 챙겨 주지 않았다. 또한 키케로가 로마에 돌아왔을 때도 반갑게 맞아 주지 않았고, 그가 브룬디시움에 오랫동안 머물고 있을 때도 한 번도 만나러 간 적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어린 딸이 먼 길을 혼자 떠날 때도 호위할 사람이나 필요한 물건들을 챙겨주지 않았다. 게다가 키케로가 없는 동안에 그 많던 살림을 다 처분해 버리고 큰 빚까지 만들어놓았다." 결국 그는 이혼을 하고 부유한 젊은 여인과 결혼하였는데, 빚을 갚기 위한 동기도 어느정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본래는 이 여인의 재산을 관리해주던 후견인이 키케로였는데, 어느새 나이차이를 극복하고 결혼한 셈. 당대에도 이건 [[막장드라마]]로 보였는지, 안토니우스는 키케로의 재혼 문제에 대해 조강지처를 버렸다고 비판했다. 물론 우리는 안토니우스가 키케로 사후 [[클레오파트라 7세|훨씬 더 거한 스케일의 막장드라마]]를 찍었음을 안다(...).] 또한 자신의 철학을 설명하는 글 자체도 엄청나게 잘 썼다. 비슷한 인물로 [[카토]]가 있으나, 그는 저술을 많이 남기지 않은 편이다. >그러니까 키케로의 고유한 [철학적] 기여는 무엇보다도 다음에서 찾을 수 있다(이는 단순 번역을 통한 그의 철학적 기여와는 구별해서 보아야 한다). 키케로의 작업 방식은 이렇다. 키케로는 각 [철학] 학파 중에서 각기 학파를 대표하고 그 학파를 집약적으로 부여줄 수 있는 저자를 고르고 그들의 입장과 견해를 객관적으로 공정하게 진술한 다음, 각각의 입장과 견해를 비판적으로 접근하는데, 이 과정에서 키케로는 표현 양식의 문학적 맥락에 따라 자신의 고유한 척도를 탐색한다. 그러니까 [이를 통해서] 자기가 수집하고 정리한 각 학파의 교리와 입장을 단순하게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각 개별 학파의 이론에 대해서 비판적 접근과 논의를 제공하자는 것이 키케로 [철학의] 근본 특성이라 할 수 있다. (···) 키케로의 저술들은 이러한 점에서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의 [「철학자들의 생애」] 모음집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이러한 키케로의 특징은 현대 독일의 대학 강단에서 진행되는 철학 교수들의 강의 진행 방식과 전혀 다르지 않다는 점도 이 자리에서 언급해야 할 것이다. 정신-사상의 발전에 대한 해명과 해석 그리고 이에 대한 비판적 접근과 전승되어온 철학 이론들의 합리적 재구성이 적어도 최근 10년 동안 독일 대학 강단의 [강의 방식]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대 철학 교수들이 세미나와 독강형 강의(Vorlesung)에서 하는 강의 방식은 키케로가 「최고 선악론」에서 실제로 실연해 보였으며 그가 간략하게 요약-제시했던 작업 방식과, 내 생각에는 근본적으로 전혀 구별이 가질 않는다. >---- >Gunther Patzig,[* 독일의 현대 철학자.] Cicero als Philosoph, am Beispiel der Schrift "De finibus", Gymnasium 1979(86), p. 311 인용. 또한 키케로가 남긴 수많은 저술들은, 후대의 [[공화주의]]자들에게 사상적 뿌리가 되어왔다. 역사 속에서 수많은 새로운 [[카이사르]]들이 출현할 때마다, 역시 수많은 키케로들이 출현하여 Res publica(공공의 것, 의역하면 '공화국'), Res populi(시민의 것)를 부르짖었다. 키케로들은 그 어떤 일이 있더라도 권력분립 및 상호견제 만큼은 양보할 수 없으며, 이것이 무너진다면 시민은 독재자의 노예로 전락할 뿐이라고 호소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훗날 수많은 독재자들의 롤모델이었다면, 키케로는 훗날 수많은 공화주의자들의 롤모델이었던 것이다. 비록 살아서는 [[옥타비아누스]]라는 새로운 카이사르의 제물이 되어버렸지만, 죽어서는 수많은 카이사르들을 침몰시킨게 바로 키케로이다. 또한 키케로는 단순히 기존의 체계를 지키는 것만을 고집하지 않고, 저서 『법률론』에서 공화정이 나아가야 할 올바른 길과 개혁적 방안들을 제시하는 등의 모습을 보였기에 "아무런 대안 없는 극렬수구파" 같은 비판을 그대로 듣기도 어려운 인물이고, 동료 귀족들에 대한 단순한 예스맨도 아니었고, 플루타르코스가 저술했듯이 개인으로서도 청렴했다. 또한 공화정 로마의 법 체제는 원로원의 지나친 권한 등 21세기의 관점에서는 여러모로 미흡한 점이 많다고는 하지만, 당대 기준으로는 충분히 지킬만한 가치가 있는 체제였다. 물론 소수 귀족들의 집단지도체제에 가까웠던 당대 로마 공화제의 가치를 근대인들이 지나치게 과대평가한다는 의견도 있지만, 키케로에게 그 나름대로 공화정 로마가 나아가야 할 길을 제시했다는 평가조차 부여하지 않는 것은 지나치게 인색한 처사일 것이다. >그는 인적이 끊긴 길을 따라 쫓아오는 추적자들을 조용히 기다린 끝에 기원전 43년 12월 7일에 살해되었다. 그는 운명해 가던 공화정을 지키려다가 희생된 순교자였다. 그 연사의 가장 유력한 도구였던 혀와 오른팔이 로마 광장의 연단에 못박힌 채 걸렸다. 그것은 삼두들에게 반대하는 자는 이런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는 것을 상기시키기 위한 잔인한 조치였다. >키케로가 안토니우스를 비판한 것은 무모하고 단견적인 행위였을 수도 있지만, 그는 공화정 말기에서 개인적 영예와 위신을 위한 귀족들간의 편협한 정쟁을 초월하는 정치적 식견을 지닌 몇 안 되는 사람들 중 하나였다. 그가 품었던 공화정의 이상, 즉 이탈리아 전역의 공적 있는 귀족들과 기사 계층에서 선별한 한 사람의 지식인 엘리트의 통치를 받는 공화정의 이상은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너무 순진하고 온정주의적(paternalistic)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자기 자신의 편협한 이기심의 한계를 넘어선 관심사들에 기초하여 더 나은 세계를 지항하여 세운 이상이었다. 그것은 그의 동료 의원들, 심지어 스토아 학자연하던 [[소 카토|카토]]와 브루투스에게조차 해당되지 않았다. >---- >Friz Moritz Heichelheim, 『하이켈하임 로마사』 中 키케로가 바라본 이상적인 공화국은 법이 지배하는 국가였고, 정무관에게 행정권을, 원로원에게 권위를, 시민에게 자유를[* 오늘날 자유주의에서 말하는 '간섭의 부재'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과 개인간의 예속(dominance)에 대한 반대말로서의 자유이다. 키케로는 자신이 꿈꾸는 올바른 공화정이 인민에게 온전한 자유를 줄 것이라고 상상했다. 그러나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자면 이는 실질적으로 매우 결함이 있는 자유이다. 왜냐하면 실질적으로는 금권 정치로 이어져서, 빈자가 부자에게 개인과 개인의 관계로서 예속당하기 때문이다. 정치학적 의미에서 키케로의 후계자라고 할 수 있는 후대의 공화주의자들조차도, 다시 말해 키케로를 가장 호의적으로 평가해줄 수 있는 사람들마저도, 키케로의 자유관을 수용하는 동시에 '빈자가 경제적 이유로 부자에게 예속되는 것'을 막는데에 관심을 기울인다는 점에서 키케로의 한계를 인정하고 있다. 즉 이 부분에서 만큼은 키케로가 명확한 한계를 가지고 있던 셈.] 부여하는 국가였다. 그리하면 그 나라의 국민들은 평화롭고 안전하게 살면서 일하고, 엘리트들은 지위와 위신에 걸맞는 성취감을 누릴 수 있다고 본 것이다. 또한 키케로의 정치적 숙원은 자신의 출신인 기사계급과 원로원 주류인 귀족계급 사이의 갈등을 해소하고 화합을 이뤄냄으로써 공화정에 안정에 기여하는 것이었는데, 이는 결국 공화정이 무너지면서 실현되지 못한다. 결국 키케로에 대한 긍정적 평가와, 부정적 평가는 모두 키케로가 바라보았던 이상적인 국가의 모습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긍정적인 면에서 보자면, 키케로가 바라본 이상국가는 고대와 중세, 그리고 근대의 유럽인들이 바라본 가장 이상적인 국가의 모습에 상당히 부합한다. 제정시대의 로마 역시도 이념적으로는 스스로를 공화국으로 바라보았으며, 중세에도 근대에도 가장 아름답다고 여겨지던 체제는 '강력한 행정권자'와 '권위를 지닌 엘리트'와 '여론'이 균형을 이루던 혼합정 체제였다. 웃기게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군주들은 키케로의 논리를 인용하여 자신들이 행정권을 휘두르되 엘리트의 권위와 여론을 존중하는 군주라고 옹호하였고, 엘리트들은 키케로의 논리를 인용하여 군주 혼자 다 해먹으면 제대로 된 나라가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물론 민중들은 국가는 Res publica(공공의 것)라는 키케로의 논리를 좋아했다.[* [[파리 코뮌]] 같은 극단적 예외들을 제외한다면, 근대의 시민혁명들은 엘리트의 권위와 여론의 균형이 있는 혼합정을 주장한 경우가 많았다. 불과 19세기까지만 하더라도 영국인들은 [[고대 아테네]]의 민주정보다는 [[스파르타|고대 스파르타]]의 혼합정을 이상적 체제로 해석하였다.] 이렇듯 그의 논지는 어느 쪽이든 좋게 해석할 여지가 존재했기에 훗날 군주, 귀족, 부르주아, 공화주의자, 급진론자 등에게 모두 수용된 것이다. 엘리트들의 권위를 옹호하는 키케로의 논리는 오늘날에는 그 호소력을 상당히 잃었으나, 제아무리 여론이 원하더라도 [[독재|견제가 불가능한 절대권력]]은 결코 허용해서는 안된다는 공화주의적 호소는 여전히 유효하고 설득력이 있다. 이러한 면모에서 볼 때, 키케로가 민중을 대하는 태도를 이해할 수 있다. 키케로는 새로운 법안을 추진하여 민중들의 폭발적인 지지를 이끌어내되 체제를 흔들 수 있는[* 최소한 당대 엘리트들의 관점에서 해석할 때 그러한 건덕지가 있는] 방법은 비판을 하였으나, 체제를 흔들지 않고 그 건전성을 올리는 틀 내에서는 민중들의 유익함을 추구하는 행보를 보였다. 특히 그가 킬리키아 속주와 [[시칠리아(속주)|시칠리아 속주]]에서 보인 행보는, 그가 공직자로서 품고 있던 사상을 엿볼 기회를 제공한다. >로마에 흉년이 들어 식량이 부족했을 때 키케로는 재무관으로 임명되어 시칠리아로 건너갔다. 그는 그곳에서 강제로 식량을 모아 로마로 보냈으므로 섬사람들은 그를 무척 원망하였다. 그러나 그가 얼마나 공정하고 너그럽게 일을 처리하는지를 차차 알게 되자, 그들은 키케로를 지금까지의 어느 총독보다 더 존경하게 되었다. >---- >키케로는 파르티아에서 전사한 크라수스 2세의 뒤를 이어 복점관이 되었다. 그리고 곧 킬리키아의 총독이 되어, 보병 1만 2천 명과 기병 2천 6백 명을 거느리고 그곳으로 건너갔다. ··· 그 뒤 파르티아군과 싸우던 로마군이 크게 패배하자 킬리키아 사람들이 반란을 일으킬 기미를 보였다. 그래서 키케로는 온화한 정책을 써서 그들을 가라앉히고, 다시금 로마에 순종할 수 있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는 여러 나라의 왕들이 보내는 선물을 하나도 받지 않았고, 각 지방에서 베풀던 성대한 제사나 잔치도 중지시켜 주민들의 부담을 덜어 주었다. ··· 또 그는 많은 공금을 개인적으로 사용하는 일을 완전히 뿌리뽑아 각 도시 주민들의 부담을 덜어 주었으며, 손해를 변상한 사람에게는 그 이상의 벌을 주지 않았음은 물론 시민으로서의 권리도 보장받을 수 있게 했다. >----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中 공직자로서 키케로는 기존의 틀을 깨지 않고 여건이 허락하는 한 자신이 모범을 보이고 공익을 모도하는 등 온건하게 처신하는 데 힘썼다. 그의 이러한 면모는 거의 모든 공직자가 자기 재산을 불릴 장소 정도로 취급한 속주에서 활약할 때 장점이 극대화되어 성공적인 임기를 가능케 했다.[* 일례로 카이사르 암살의 주역 브루투스는 로마에서 고결한 성품으로 명성을 떨쳤으나, 속주에선 연이율 48%라는 조건으로 고리대금업을 벌여 재산을 불렸다.] 그리고 이런 면모가 평가를 받았기 때문에, 키케로는 신참자라는 불리함에도 불구하고 그가 보호자를 자청한 이탈리아 유산자들의 지지에 옵티마테스의 지원이 더해지면서 집정관에 선출되는 기쁨을 누릴 수 있었다. >마르쿠스: 퀸투스, 자네는 호민관직의 폐해를 명백하게 간파했지만,[* 호민관의 권한이 너무 막대하여 온갖 폐해가 생겼다는 주장.] 무릇 사물을 비판함에 선한 점들은 제외하고 악한 점만 열거하고 폐단들만 선정하는 것은 불공정하네. 왜냐하면 그런 식으로 말하자면 통령직 역시 비난을 받을 수 있지. 내가 일일이 꼽고 싶지는 않지만 통령들의 범법행위도 얼마든지 자네가 수집할 수 있을 것일세. 나도 호민관의 저런 권한에 나쁜 면이 내포되어 있다고 생각하네. 그러나 저 제도에서 시도하는 선(善)은 저런 악이 없이는 달성하지 못할 것이네. ··· "그렇지만 인민이 호민관한테서 선동을 받는 수가 많다!"(라고 말해지지만) 또 그만큼 호민관한테서 무마되는 수도 많다네. 호민관들의 집단이 하도 가망이 없어서 열 사람 가운데 한 명도 온전한 정신이 아닌 그런 사태가 가능하겠는가? 티베리우스 그라쿠스 본인을 파멸시킨 사람은 거부권을 행사하다 무시만 당했을 뿐 아니라 아예 정무직에서 제거당한 인물이었지. 그러니까 그를 몰락시킨 것은 거부권을 행사하는 동료에게서 권한을 박탈한 바로 그 조처가 아니고 무엇인가?[* 티베리우스 그라쿠스의 몰락은 동료 호민관의 거부권 행사를 막은 그의 독단에 있는 것을 말한다. 또한 호민관의 정책은 동료 중 1명만이 거부권을 행사해도 막히는데, 티베리우스처럼 극단적인 케이스(동료의 해임)를 제외한다면, 그릇된 정책일지라도 최소한 동료 1명의 거부권은 나올 것이므로 호민관직은 여전히 유익하다는 의견이다.] ··· 참으로 선량하고 다정한 아우님. 호민관 권력과 충돌한 우리의 사건은 호민관직 자체와는 아무런 시비가 없었네. >---- >키케로, 『법률론』 3.10.23-24 또한 키케로는 대중주의자는 결코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인민의 유익함을 등한시한 인물도 아니다. 특히 『법률론』의 3권에서는 키케로 나름의 개혁안이 돋보인다. 정무직을 수행하는 공무원에게는 명예로운 퇴직을 권장하되[* 정무직을 수행하는 자는 "자신과 부하들을 통솔하도록 할 것이며, 자기 국민의 영광을 선양할 것이며, 승리해 귀국함으로써 칭송을 받도록 할지어다."(3.3.9)] 퇴직 공무원에게 면책특권을 부여하지 않는다.[* "정무직에서 이직한 사인(私人)들은 호구조사관에게 봉직 기간의 업무에 대한 기록부를 제출할지어다. 그렇다고 법률로부터 더 면책되어서는 안 될지어다."(3.4.11)] 당시의 전관예우 제도인 '무임소 사절'[* libera legatio: 국가 경비를 여비로 받아서 사무를 처리하고 다니는 폐습.] 제도를 제한하고자 하는데 이것은 키케로 자신이 집정관 시절 때 폐지를 시도했으나[* "이런 종류의 사절직함이라면 내가 통령이었을 적에, 어느 경박한 호민관이 내게 반대만 하지 않았더라면 거의 폐지될 뻔했다네."(3.8.18)] 제한을 가하는 데 그쳤고, 이번의 법안에서 구체적 법조항으로 그 폐지를 다시 시도한 것이다. 또한 그는 정무관과 원로원의 청렴의무도 규정하고,[* "권자에 출마한 동안도, 수행하는 동안도, 수행한 후에도 선물은 받지도 말고 주지도 말지어다."(3.4.11)] 호구조사관이 청렴문제를 감독할 권한을 갖는다고 규정한다. 이는 원로원의 횡포를 막기 위함이다. 또 한 투표로는 한 안건만 취급하게 해서 일괄투표에 의한 정치타협을 막으려고 시도했고, 원로원 운영세칙으로 출석의무를 규정하였으며, 각자가 사전에 발언을 신청해 그 순서대로, 한 사람씩만 발언하자는 제안을 하여 장시간 발언으로 인한 지연작전을 펴지 못하게 의도했다. 또한 민회에서의 폭력을 금지하려고 했고 그런 사태에서는 사회자가 책임을 지게 하였고, 민회나 정무관의 결정에 대하여 거부권(veto)을 행사하는 자는 국가에 공헌하는 용기 있는 인물로 간주되어야지, 정권에 도전하는 정적으로 간주되어서는 안 된다는 규정도 새로 넣었다.[* 원로원 회의에 출석하지 않은 원로원 의원은 사유를 제출하거나 견책을 당하거나 할지어다. 원로원 의원은 자기 차례에서 절도 있게 발언할지어다. 그는 인민의 현안문제를 파악하고 있을지어다. 인민회에서는 폭력이 있어서는 안될지어다. 회의에서는 동등하거나 상위의 권한이 (회의를 사회하는 자의 권한보다) 우월할지어다. 그러나 의사를 진행하다가 소란이 발생할 경우의 과실은 회의를 사회하는 당사자가 짊어질지어다. 좋지 않은 사안에 거부권을 행사하는 자는 국가의 안녕에 이바지하는 시민으로 간주될지어다.(3.4.11)] 물론 키케로의 이러한 개혁조치들은 공화정을 밑바닥부터 뒤집는 정책이 아니라, 공화정이라는 기본적인 체제를 유지하고 사회 전체에서 두루두루 합의되어있는 가치를 보호하되, 체제의 건전성을 높이려고 시도한 본질적으로 '보수적인' 개혁이다. 하지만 그가 아무런 대책이 없이 과거만을 부르짖었던 인물은 아님을 보여준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 부분에서 많은 오해가 있는데, '''키케로는 옵티마테스가 아니며 옵티마테스를 비판했다.''' >전반적으로 보아 장차 공화국의 정무를 맡아보려고 하는 자들은 필히 플라톤의 두 가지 교훈을 명심해야 된다고 생각한다. 첫째는 항상 시민의 이익을 염두에 두고, 무슨 일을 하든지간에 사리사욕을 떠나 시민의 복리를 증진시킨다는 것이고, 둘째는 공화국 전 시민들을 일일이 보살펴야 하는 것인데, 이때 어느 일부 계층의 사람들만을 돌보다가 다른 계층의 사람들을 무시하지 않도록 각별히 조심해야 한다. 왜냐하면 국가경영은 후견인의 일과 같아서 그것을 위탁한 사람들, 말하자면 전체 시민의 이익을 위해 수행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부 시민의 이익을 배려해 주다보니 또 다른 일부 시민을 무시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들은 공화국에 가장 위험한 소요와 불화를 불러일으킨다. 그 결과 어떤 자들은 포풀라레스로 나타나고, 그 밖의 다른 자들은 열렬한 옵티마테스로 보이게 되는데, 이때 국가 전체를 생각하는 사람들은 극소수이기 마련이다. >---- >『의무론』1.25.85 [[옵티마테스]]와 [[포풀라레스]]라는 단어는 오늘날의 정당, 특히 양당제 구도에서의 정당 개념과는 다르며, 좌파 우파 등 정치적 스탠스 개념과도 다르다. 그보다는 '공화국 전체의 이익을 생각하지 않는 자들' 정도의 뉘앙스에 가깝고, 실제로 옵티마테스들과는 정치적 견해에서 상당한 차이가 났다. 특히 이를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은 [[가이우스 마리우스]]와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에 대한 그의 태도이다. >따라서 친구들 간에 이익이 되면서 아무에게도 해가 되지 않는 바로 그러한 관대함을 베풀도록 해야 한다. 그러므로 루키우스 술라와 가이우스 카이사르가 정당한 주인에게서 돈을 빼앗아 남들에게 준 것은 관대하게 보여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그 자체가 정의로운 것이 아니면 절대로 관대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 >『의무론』1.14.43 >참으로 동맹국들에 대한 어떤 강압정책도 공정치 못하다고 생각되는 시대는 이미 지나가버렸으니, 그것은 로마 시민들에게조차 그처럼 잔학한 행위가 가해지는 것을 볼 때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술라의 경우, 명예롭지 못한 승리는 도덕적으로 선한 명분을 수반할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그는 선한 시민들과 부자, 그리고 확실한 로마 시민의 재산을 빼앗아 광장에서 창을 꽂아 놓은 채 경매에 붙여 팔면서도 뻔뻔스럽게 "나는 나의 전리품을 팔고 있는 것이요"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 >『의무론』2.8.27 반면 [[가이우스 마리우스]]에 대해서는 직접 서사시 『마리우스』를 지었을 정도로 호의적이었던 사람이 키케로이다.[* 다만 모두 호평한 것은 아니고, 동료 시민 살해는 비판했다.] 물론 마리우스는 키케로와 동향 사람이므로 [[우리가 남이가]] 정신에 입각한 것일 가능성도 있으나 술라와 마리우스에 대한 키케로의 태도는 그가 단순히 "옵티마테스 만세"를 외치는 인물은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물론 결과적으로는 카이사르 등에게 대항하기 위해 옵티마테스들과 함께 행동한 것을 부정할 수 없고, 관점에 따라서는 이것이 비판의 여지가 있음은 부정할 수 없지만 키케로가 옵티마테스의 파당적 이해만을 추구한 것은 결코 아니다. 카이사르에 반대한다고 다 옵티마테스인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폼페이우스와 카이사르의 내전이 발생했을 때 키케로가 보여준 반응은 (업적 여부와는 별개로) 키케로가 '체제의 건전성'과 '민중의 유익함'이라는 양자 속에서 어떻게 갈등했는지를 인간적으로 보여준다. >사실 이때 키케로는 누구를 편들어야 할지 몰라 무척 고민을 하고 있었던 것 같다. 이것은 그의 편지 속에 적혀 있는 다음 구절만 보아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나는 어느 편에 가담해야 좋을지 정말 모르겠다. 폼페이우스는 명예롭고 떳떳한 이유로 싸우고 있고 카이사르는 자기 자신과 민중을 구할 만한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있다." >----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키케로 열전』 中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